1세~35세 | 1세(인종 원년 1545) | 3월 8일(양 4월 28일) 새벽, 서울 건천동(인현동 1가 중에서도 중앙 지대)에서 탄생하다. |
22세(명종 21년 1566) | 10월, 처음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다. | |
23세(명종 22년 1567) | 2월, 아들 회가 나다. | |
27세(선조 4년 1571) | 2월, 아들 울이 나다. | |
28세(선조 5년 1572) | 8월, 훈련원별과 시험에 응시 중, 말 위에서 떨어져 왼쪽발이 절골되다. | |
32세(선조 9년 1576) | 2월, 식년무과의 병과(정기적으로 보이는 과거의 성적에 따라 나눈 등급)에 합격하다. 12월,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(종 9품)이 되다. | |
33세(선조 10년 1577) | 2월, 아들 면이 나다. | |
35세(선조 12년 1579) | 2월, 훈련원봉사(종 8품)가 되다. | |
36세~46세 | 36세(선조 13년 1580) | 6월, 발포의 수군만호가 되다. |
38세(선조 15년 1582) | 1월, 군기경차관(조사관)의 사원에 의한 보고로 파직되다. 5월, 다시 복직되어 훈련원봉사가 되다. | |
39세(선조 16년 1583) | 7월, 함남병사의 군관이 되다. 10월, 건원보의 권관이 되다. 11월, 훈련원참군으로 승진하다. | |
40세(선조 17년 1584) | 향리 아산에서 분상, 휴관하다. | |
42세(선조 19년 1586) | 1월, 사복시(거마에 관한 일을 맡은 관청)의 주부(종 6품)가 되다. 16일 후, 다시 함경도 조산보만호로 전근되다. | |
43세(선조 20년 1587) | 8월, 녹둔도의 둔전관을 겸하다. 오랑캐의 기습을 격파하였으나 병사 이일의 무고로 파직되어 백의 종군하다. | |
44세(선조 21년 1588) | 윤 6월, 귀가 한거하다. | |
45세(선조 22년 1589) | 2월, 전라순찰사 이광의 군관이 되다. 11월, 선전관을 겸하다. 12월, 정읍현감이 되다. | |
46세(선조 23년 1590) | 7월,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로 발령되다. 다시 8월에는 만포진첨사로 승진 발령되었으나 대간들의 반대로 정읍현감에 유임되다. | |
47세~54세 | 47세(선조 24년 1591) | 2월, 진도군수로 전임 발령되었으나, 부임하기 전 가리포 수군첨사로 전임발령되다. 다시금 2월 13일에 전라좌수사로 임명되다. |
48세(선조 25년 1592) |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다. 6월, 사천 당포 당항포 및 율포 해전에서 왜선 70여척을 격파하다. 왼편어깨에 적의 총환을 맞다. 7월, 견내량 및 안골포 해전에서 왜선 60여척을 격파하다. 9월, 부산 해전에서 왜선 470여척중 130여척을 격파하다. | |
49세(선조 26년 1593) | 7월,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기다. 8월,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다. | |
50세(선조 27년 1594) | 3월, 명나라의 선유도사 담종인의 금토패문에 항의하는 답문을 올리다. 10월, 장문포의 왜군을 육군장 곽재우 김덕령 등과 함께 수륙으로 합공하다. | |
53세(선조 30년 1597) | 2월, 원 균의 모함과 당쟁의 희생이 되어 서울로 끌려가다. 3월 4일, 감옥에 들어가다. 4월 1일, 재옥 28일 만에 특사되어 도원수 밑에서 백의종군하다. 7월, 칠천량 해전에서 통제사 원 균이 대패함에 8월 3일, 3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다. 연해 각지를 탐색하여 군사 120명과 전선 12척을 거두다. 9월, 명량해전에서 12척의 전선으로서 왜선 133척과 싸워 31척을 격파하다. 10월, 고하도에서 수군 진영을 설치하여 전비를 강화하다. | |
54세(선조 31년 1598) | 2월, 수군 진영을 고금도로 옮기다. 7월, 명나라의 수군 도독 진린과 조명연합함대를 편성하다. 11월 19일(양 12월 16일) 노량해전에서 총환을 맞아 전사하다. 노량해전때 향불을 피우고 [이 원수만 없이 한다면 죽어도 한이 없아오니 도와 주옵소서]라고 하늘에 빌었으며, 총환을 맞자 아래와 같은 유언을 남겼다. 방패로 내 앞을 가려라. 싸움이 한창 급하다.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. |